이지철 목사 · 《설교트렌드 2027》 Chapter 2·3

반창고가 아니라 수술을 — 설교트렌드 2027

변하고 싶은데 변하지 못하는 사람이
매주 예배당 의자에 앉습니다.
그 의자 위에 쌓인 마른 장작 이야기입니다.

30분 강의 · 《설교트렌드 2027》 Chapter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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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주, "올해는 꼭 지키겠습니다" 손을 든 사람의 절반은
부활절을 보지 못하고 그 손을 내립니다.

의지가 약해서가 아닙니다. 변하고 싶은 마음은 진짜입니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01

청중의 다짐은
월요일에 증발한다

다짐은 증발한다

포브스 헬스가 2023년 10월 미국 성인 1,000명을 상대로 벌인 조사에서 새해 결심의 평균 유지 기간은 3.74개월로 나왔습니다. 석 달을 넘기지 못하고 손을 놓는 사람이 절반이 넘습니다. 영어권에는 1월 17일을 '새해 결심을 버리는 날'이라 부르는 관행이 있고, 운동 기록 앱 스트라바는 이탈이 몰리는 1월 둘째 주 금요일에 '포기자의 날'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결심이 무너지는 날에 이름까지 달아 놓은 것입니다.

교회도 다르지 않습니다. 변화는 결심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청중은 간절하게 변하고 싶어 하지만, 그 다짐은 주일 저녁 식탁 앞에서 이미 녹기 시작합니다.

주일의 은혜가 월요일을 견뎌낼 만큼 내면에 뿌리내리지 못한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서 강단이 자주 놓치는 지점이 있습니다. 결심을 변화의 원인이라 믿는 순간, 강단은 위험해집니다. 원인을 만드는 사람과 조건을 만드는 사람은 전혀 다르게 행동합니다. 원인을 만든다고 믿는 설교자는 통제할 수 없는 것을 통제하려 하고, 책임질 수 없는 것까지 짊어지려 합니다. '더 헌신하라', '더 결단하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청중은 변화를 의지의 문제로 각인합니다. 그리고 실패할 때마다 의지가 부족한 자신을 탓합니다.

20년 동안 새벽예배를 빠지지 않은 한 성도가 어느 날 조용히 물었습니다. "목사님, 저는 왜 안 변할까요?" 개인의 질문처럼 들리지만, 사실은 구조에 대한 질문입니다. 오래 반복된 결심이 쌓이면서 생긴 피로에서 나온 질문입니다. 그 피로는 게으름이 아닙니다. 20년을 버텨온 사람의 피로입니다.

결심이 쌓인 자리에 절망이 자란다면, 그것은 청중의 실패가 아니라 구조의 실패입니다. 설교자가 만들어야 할 것은 더 강한 결단의 촉구가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다른 조건입니다.

02

거룩한 불만족

거룩한 불만족

명문대를 졸업하고 늘 자신감에 넘치던 대기업의 고향 친구가 식사 자리에서 한마디를 건넵니다.

"우리 나이가 되면 알아. 임원으로 승진할지 못 할지. 난 아무래도 승진 못할 것 같아."

— 고명환, 《나는 어떻게 삶의 해답을 찾는가》

세상이 정해놓은 기준을 좇아 달려왔지만, 결국 남은 것은 허무입니다. 이런 허무 앞에 선 사람에게 주일 설교가 닿지 못하면, 은혜는 예배당 문턱을 넘지 못하고 휘발됩니다.

주일 예배당에 앉아 있는 사람의 내면도 비슷합니다. 겉으로는 무표정하지만, 속으로는 묻고 있습니다. '나는 왜 이 모양인가.'

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이 청중이 강단 앞에 가지고 오는 거룩한 불만족입니다.

뼈가 부러졌는데
반창고를 붙이는 의사는 없다

03

설교는 반창고가 아니라
수술이어야 한다

반창고 vs 수술

겉만 고치는 변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많은 강단이 청중의 내면적 골절에 도덕적 반창고만 덧붙입니다. 그 결과 강단은 늘 같은 형식의 신자만 만들어냅니다.

"벌 받을까 봐, 믿음 없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자기 속에 있는 말을 못하는 착한 신자를 양산해 낸 느낌이 크다."

— 김상권, 《청년설교》

행동만 수정하는 설교는 상처에 임의로 테이프를 붙이는 것과 같습니다. 반창고를 열 번 갈아 붙여도 깊은 상처는 낫지 않습니다.

"점점 강도가 약해지는 쾌락을 향한 점점 강해지는 욕망."

— C.S. 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이 욕망은 "하지 말라"는 훈계로 꺾이지 않습니다. 억누를수록 죄는 땅 밑으로 내려가 더 은밀하게 꿈틀거립니다. 작심삼일의 악순환은 의지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입니다.

존재의 수술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는 삭개오가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삭개오에게 윤리 강의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죄하지도, 설득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저 그의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하셨을 뿐입니다. 삭개오는 그 만남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고, 완전히 다른 존재가 되었습니다. 행동을 고치라는 요구가 아니라 사랑이 그를 수술했습니다.

청중이 원하는 것은 눈 가리고 아웅하는 회칠이 아닙니다. 속을 도려내는 수술, 존재 자체가 뒤집어지는 변화입니다.

04

기계가 할 수 있는 것,
없는 것

AI가 못 하는 일

AI가 설교 원고를 대신 써주는 시대입니다. 본문을 넣으면 삼대지 구조까지 멋지게 짜여 나옵니다.

여기서 생각해 봅시다. 자신의 심연을 깊이 들여다본 묵상 없이 만들어진 설교가, 청중의 본질인 존재를 수술할 수 있습니까?

기계가 반창고를 깔끔하게 잘라 줄 수는 있습니다. 속을 긁어내고 죄의 고름을 짜내는 수술은 사람만이 합니다.

그렇다면 청중은 그 수술을 두려워할까요. 아닙니다. 오히려 기다리고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메스를 대는
외과의사를 원망하는 환자는 없다

05

청중은 자신을 찔러 줄
설교를 기다린다

청중의 현장

청중이 원하는 것은 듣기 좋은 말이 아닙니다. 자신의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짚어주는 말입니다. 신영준과 고영성은 절망의 본질을 이렇게 짚습니다.

"절망은 삶이 우리를 버렸다는 신호가 아니다.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는 분명한 통보다."

— 신영준·고영성, 《인생을 위한 최소한의 생각》

청중이 예배당에 앉아 느끼는 불편함도 같은 구조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내면의 경고입니다. 그 경고에 "은혜받고 힘내세요"로 응답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습니다.

청중의 삶의 현장은 생각하는 것만큼 깔끔하고 평온하지 않습니다. 땀 냄새와 눈물 냄새가 뒤섞인 자리입니다.

침실

내일 법원에 낼 이혼 서류를 침대 머리맡에 두고 온 집사가 있습니다.

사무실

구조조정 명단에 이름이 올라간 청년이 게시판 앞에 멍한 눈으로 서 있습니다.

병실

병든 부모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기도조차 말라버린 장년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십니다"라는 말만으로는 부족합니다. 그 함께하심이 이혼 서류 위에서 어떻게 작동하는지, 구조조정 통보를 받은 월요일 아침에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줘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

— 히브리서 4장 12절
06

낡은 자동 번역기를
바꾼다

번역기를 바꾼다

여기서 오해하면 안 됩니다. 찌른다는 것이 상처 난 사람을 또 때리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이 찌르는 대상은 청중의 아픔이 아니라, 청중 안에 굳어진 거짓 해석입니다.

"우리가 겪는 일에 습관적으로 의미를 부여해 버리는 내 안의 낡은 자동 번역기를 통째로 새로운 버전으로 바꿔 끼우는 것, 그게 바로 마음을 단단하게 만드는 진짜 훈련이다."

— 김주환, 《내면소통》
1

낡은 번역기

"나는 안 되는 사람이야"

2

말씀이 찌른다

거짓 해석 절개

3

새 번역기

"나는 은혜받은 사람이야"

"나는 안 되는 사람이야"가 "나는 이미 은혜를 받은 사람이야"로 바뀌는 순간이 청중이 갈망하는 변화입니다. 듣기 편한 위로가 아니라, 자기 안의 낡은 대사를 부수는 한마디를 기다립니다.

그렇다면 그 한마디는 어디서 오는가.

07

설교자의 한 문장이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인다

마른 장작

청중의 내면에는 이미 변화를 향한 장작이 쌓여 있습니다. 거룩한 불만족이 장작입니다. '이대로 살 수 없다'는 자각이 장작입니다. 설교자는 그 장작에 불을 붙이는 사람입니다.

저도 타지 않는 장작을 오래 끌어안고 뒹굴었습니다. 끊어내지 못하는 습관, 죄악된 생각 때문에 기도 자리에 앉을 때마다 몸부림을 쳤습니다. 변하겠다고 다짐하며 흘린 콧물과 눈물만 담아도 주전자가 채워질 것입니다.

불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목마름도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한 번, 바쁜 일정에 쫓겨 묵상 없이 설교를 준비한 적이 있습니다. 자료는 충분했고 자신감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강단에 선 순간 깨달았습니다. 제 안 깊은 곳에서 끌어올릴 것이 없었습니다. 정보는 원고에 가득했지만, 생수를 채우지 못했습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목마른 사람이 건네는 촉촉함이 아니라 건조한 보고서였습니다. 설교자가 먼저 마시지 않으면, 청중에게 생수를 먹이려는 시도는 영적 기만이 됩니다.

어느 주일, 초청받았던 한 목회자가 강단에서 고백했습니다.

"저는 늘 한 가지 행동에 넘어졌습니다."

— 먼저 넘어졌다 일어난 사람의 떨리는 고백

그 한마디가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평범했습니다. 정교한 신학 정보도 아니고, 완벽한 처방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이후 제 안에서 죽은 듯 누워 있던 낱말들이 흐트러지며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문제는 청중이 원하는 설교가 바뀌었는데, 설교는 여전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청중이 '가나안 교인'을 자처한다."

— 김도인, 《설교는 글쓰기다》

청중의 갈망은 바뀐 지가 오랩니다. 초등교육부터 들어온 도덕적 훈계를 원하지 않습니다. 존재의 밑바닥에서 자신을 일으켜 세울 촌철살인의 한마디를 원합니다.

설교자의 장작이 먼저 타올라야
청중의 장작에도 불이 옮겨붙는다

08

그 한 문장이
변화를 점화한다

피 냄새가 나야 한다

사마리아 여인이 그랬습니다. 다섯 남편에게서 갈구했던 것을 마침내 예수님 앞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생수를 만난 뒤, 여인은 생명줄처럼 붙들고 있던 물동이를 미련 없이 내던지고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평생 숨어 지내던 사람이 나서고, 감추던 사람이 증언했습니다. 이것이 해갈의 기쁨이 만드는 변화입니다. 마른 장작에 불이 붙는 순간과 목마름이 해갈되는 순간은 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청중이 진짜 기다리는 것은 이 한 가지, 존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순간입니다.

분주히 설교를 준비하던 손을 잠시 내려놓고, 새해 첫 주 손을 들었다가 부활절도 오기 전에 내려놓은 청중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 손은 포기의 손이 아닙니다. 살려달라는, 변하고 싶다는 구조 요청입니다.

1월 17일, 결심을 버리는 날을 다시 보십시오. 그날은 그만두는 날이 아닙니다.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고 변화의 시작을 점검하는 날입니다.

반창고 수술
덮음 찔림
정보 고백

변하고 싶은데 변하지 못하는 사람이
매주 예배당 의자에 앉습니다.

그 의자 위에 쌓인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은
설교자의 한 문장입니다.

목사의 원고에서 피 냄새가 나야
성도의 가슴에 불이 붙습니다.

이 이야기가 실린 책

설교트렌드 2027

변화시키는 설교


Chapter 2 · 3
청중은 설교로 자신의 변화를 갈망한다 외

이지철 목사 집필 4편 수록 · 공저 12인

글과길 · 아트설교연구원 설교시리즈 4